(부산=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라는 구절로 유명한 안도현의 시는 하찮아 보이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무가 타고 남은 검은 숯은 '숯의 작가'를 만나 그 의미를 얻는다. 이배(64)는 30년간 숯을 사용해 자연의 섭리를 표현했다.

부산 조현화랑 달맞이·해운대 두 곳과 서울 갤러리2, 제주도 갤러리2 중선농원에서 동시에 열리는 이배 개인전은 숯의 작가가 찾은 숯의 특별함을 보여준다.

숯을 잘라 캔버스에 붙이고 표면을 갈아 완성하는 'Issu du feu', 숯가루를 짓이겨 화면에 두껍게 붙이는 'Landscape', 목탄에서 추출한 검은 안료로 형태를 그리고 밀랍 같은 두꺼운 재료로 덮은 'Acrylic medium' 등 대표작이 모두 나왔다.

경북 청도 출신으로 홍익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는 30대 초반인 1990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파리에 가기 전에는 다양한 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물감도 마음 놓고 사기 어려웠던 궁핍한 젊은 화가는 이국에서 숯을 재료로 쓰게 됐다.

조현화랑에서 만난 작가는 "파리에 갔는데 뭘 해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인상적인 작품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면 활동할 수가 없었다"라며 "그러다 우연히 숯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작업실 근처 가게에서 싼값에 파는 숯을 발견한 작가는 매일 숯으로 인체 등을 그렸다.

싸다는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숯은 한국이라는 작가의 뿌리를 담은 재료였다.

이배는 "거대한 수묵 문화권 출신인 내게 숯은 익숙한 재료였다"고 회상했다. 막상 한국을 떠나니 한국적 재료가 눈에 들어온 셈이다.

당시 그는 파리 인근 옛 담배공장에서 작업했다. 형편은 어렵지만 패기 넘치는 젊은 작가들에게 버려진 담배공장은 소중한 작업실이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기자에게 이배는 "숯은 모든 물질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말했다. 숯의 의미를 스스로 묻고 또 물어 내놓은 답변이었다. 다 타고 남은 물질인 숯은 그에게는 생명이 농축된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때 만난 젊은 기자는 이배와 숯 작업을 다룬 기사를 썼고 전시회도 주선했다. 지금은 프랑스와 미국,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세계적인 작가를 알린 중요한 만남이었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기자였던 앙리 프랑수아 드바이유는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지금도 이배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큰 붓으로 화면에 작가와 붓의 움직임을 기록한 최근작 'Drawing'도 선보인다. 숯으로 만든 검은 잉크를 적신 큰 붓이 물기를 머금고 마른 종이에 흔적을 남긴 작품이다.

이배는 "최근 우리 미술이 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대중음악과 음식 등 한국 문화 전체가 관심을 받고 있다"라며 "이를 보면서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한국 사람만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겸재 정선이나 김환기 작품처럼 한국인만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감수성을 작가는 몬순 기후에서 찾았다.

작가는 "너무 우악스럽지 않고 계절 변화가 있는 몬순 기후 지역 문화를 생각했다"라며 "중국이나 일본과도 다른 우리만의 감성을 고민했고, 그런 몬순의 발상을 그림에 끌어내고자 했다"고 소개했다.

이배는 이탈리아 빌모트재단, 프랑스 마그재단 미술관·라코휴미술관·국립 기메박물관, 파리와 뉴욕 페로탕갤러리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2018년에는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숯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단순히 숯을 사용하는 작가라는 의미를 넘어선다. 이배는 숯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끝없이 묻고, 숯으로 거대한 자연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서울과 부산 전시는 각각 오는 23일과 31일까지, 제주는 7월 11일까지다.

연합뉴스 강종원 기자.